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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작성일 201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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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 살려 합천 항노화사업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

 

 

 

임춘지, “내 자식부터 고향에서 살도록 부모가 노력해야 하고 군정을 책임지는 이들이 지원해야 한다” ©임임분

 

1월 13일(화) 오후, 합천문화예술촌에서 임춘지 촌장을 만났다. 아래는 그와 나눈 얘기다.-임임분 기자

 

자기소개를 해달라.

1957년 초계면 내동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의사인 아버지 따라 초계초, 합천초, 삼가초 거쳐 의령초등학교에서 졸업하고 의령여중학교까지 다니고 고등학교는 진주, 대학은 서울로 갔다. 대학 졸업 뒤 아버지 병원에서 일하다가 같은 마을 동무였던 한의사 이인균(세광한의원 대표)씨와 결혼하면서 다시 합천으로 돌아왔다. 현재 합천문화예술촌 촌장·합천한의학박물관 관장이고 올해부터는 경남사립박물관협회 부회장 직도 맡았다. 합천에는 남편과 둘이 살고 자녀 둘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닌다. 어려서부터 외향적인 성향이라 의령초등학교 다닐 때 여학생 처음으로 학생회장, 의령여중에서도 선거를 거쳐 학생회장을 했다. 또 청소년기에 운동(기계체조, 투포환, 테니스)도 열심히 하고 음악(독창, 성악), 웅변도 열심히 했다. 석사는 사회복지로 받았고, 현재 박사과정으로 한방식품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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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1일 개장한 합천문화예술촌 촌장이다. 어떻게 하게 된 일인가?

합천은 문화기반시설이 부족하고 열악했다. 아버지 태생지가 적중면 상부리인데, 조부님이 일제강점기 때 지역의 어려운 이들 대신해서 일제에게 세금을 내주니 일제 세무서에서 상장을 줄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고교생 때 일본에 여행 가서 기타 사와서 기타를 치고, 검도에 펜싱도 하고 글도 쓰고, 역사, 문화, 예술을 좋아했다. 게다가 아버지는 초계면의 운석터를 홀로 10년 동안 연구하기도 했다. 초계면의 넓은 들이 백악기시대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 영향으로 생겼다고 보셨다. 대야성도 최근 합천읍에 재현을 했는데, 위치가 잘못됐다, 대야성은 초계면에 있어야 제 위치라고 보셨다. 아버지는 내 결혼 조건으로, “결혼하자마자 의료봉사를 다녀야 하고, 결혼하면 다른 데 가지 말고, 합천에서 10년은 있어라. 합천에서 꼭 필요하고 돈이 안되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해라고 하셨다. 의료봉사는 아버지 따라 늘 하던 일이니까 하면 되는데, 나머지 일은 어떻게 해야 하고 뭘 해야 하는가 고민이 많았다. 의료봉사를 다니면서 문화예술사업을 하면 자라는 아이 뿐 아니라 나이 든 노인들에게까지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문화예술사업을 시작했다. 문화예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했지만 돈이 되는 일은 아니라 살아남기는 어려운데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 덕에 요즘 다른 곳에서 모범사례로 배우러 오기도 한다.

 

합천문화예술촌의 특색은?

지역민부터 예술촌의 회원이 되게 했다. ‘봉숭아학당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노래, 의료봉사 등을 꾸준히 하고 있다. 한의학박물관 개관 전부터 약선식, 한방치료 등 다양한 약초활용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이제 우리 예술촌 프로그램에서 교육을 받은 주민과 그렇지 않은 주민의 차이가 날 정도가 됐다. ‘문화예술이라고 하면 낯설어 하고 어려워하는데, 이제는 익숙해졌다. 어르신노래교실도 합천에서 처음 했다. 용주사람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와서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전문 노래강사가 합천에 없을 때라, 지역에 있던 대중음악인 배철이 선배에게 같이 하자고 했다. 당시 지역 아이들이 체험학습을 하려면 외지로 나가야했는데, 우리 예술촌이 생기면서 지역에서 체험도 하고 놀이도 하게 됐다.

 

추가로 하고 싶은 일과 과제가 있다면?

20143월부터 12월까지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지원사업으로 <시와 나의 노래>라는 사업을 합천문화원과 함께 했고 20153월부터 11월까지는 같은 지원사업으로 <시조창:·바람·소리> 프로그램을 했다. 이어서 몇 년 고민했던 일로, 합천 각 명소에 대한 시를 써서, 그 시에 곡을 붙여, 창작곡을 부르는 남녀 혼성 합창단을 올해 만들려고 한다. 이미 작사, 작곡 담당은 확보되어 있고 합창단원만 뽑으면 된다. 현재 70% 준비되어 있다. 단원들의 연령대는 아무래도 퇴직을 한 이들로 60대 초반이 된다. 그 세대 인력이 참 많다. 합창단 창단 공연 때 노래 뿐 아니라 각 노래에 맞는 시낭독도 할 생각이다. 늦어도 내년 초에는 꼭 창단할 생각이다.

다른 지역을 보면, 이 정도 규모의 민간시설이 있으면, 군의 전체 관광사업이나 지역개발 단위와 함께 묶어서 사업을 하기도 하는데, 합천은 그렇지 않다. 합천군청의 관심과 지원이 아쉽다. 여력이 있는 민간시설이라고, 알아서 하겠지, 알아서 하라는 입장일 수도 있는데, 우리도 마냥 여유 있지는 않다. 우리 나름으로 자생하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을 테지만, 군청의 협조와 군민의 지지가 있어야 이 시설이 앞으로 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술촌 둘레에 약초를 심고 수확해서 다양한 체험도 하는데, 이 일은 지역민의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의사 하기 전 생물학 교사였다. 한약과 약초가 우리 몸에 좋다는 생각을 하시고, 직접 키우기도 하고 캐러 다니기도 하고 약초효능 연구를 많이 했고 <장수식품>이라는 상호로 합천의 건강보조식품 1호 제품을 만들어 시판하기도 했다. 하동녹차 좋다고 하지만, 농약 안치고 그렇게 재배하지 못한다. 우리는 농약 안친다. 한약찌꺼기로 거름을 한다. 아버지 뒤를 이어 건강보조식품 개발과 시판을 다시 하려고 남편과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201382일 개관한 합천한의학박물관 관장이기도 하다. 설립 목적과 방향, 과제는 무엇인가?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한의학을 좋아하셔서 따로 연구를 오래하실 정도로 한의학을 하고 싶어 하셨지만 집안 어른들이 반대해 못하고 대신 합천군 1호 의사가 되어, 보건소 소장도 맡았다고 한다. 친정 쪽 조상들이 200년 동안 모은 전통한의학과 전통생활 유물 4천여점으로 박물관을 만들어 개관했다. 이듬해인 2014년 세월호참사, 2015년 메르스사태로 조건은 열악했으나 201382일 개관전인 <유물수집 200주년:전통한의학 유물전>을 시작으로, 2013104<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전통문화의 날> 행사, 20143월부터 5월까지 <선비유물전>, 20149월부터 10월까지 신복식 작가의 <퓨전토우전>, 20141011<지역민과 함께 하는 전통문화의 날> 행사, 201531일부터 1031일까지 길 위의 인문학사업으로 <시화가 있는 우리의 한방>이라는 한방문화체험프로그램을 운영했고, 201553<지역민과 함께 하는 전통문화의 날> 행사, 20157월부터 11월까지 농촌작은문화교실로 <합천고품리연가>사업을 했고, 국립민속박물관 지원사업으로 20159~10월까지 <차차차! 건강한 인생> 행사를 했다. 문화예술과 한의학이라는 여건을 더한 사업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예정이다. 양의들이 하는 낭설 가운데, 한약이 독해서 많이 먹으면 간이 해독을 못한다느니, 한약재가 위에 찌꺼기를 남겨 암을 만든다 어쩐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봄이면 쑥으로 국을 끓여먹거나, 민들레나 씀바귀로 나물을 무쳐 먹는 일이 다 대중화된 약선식이다. , 탈이 나는 까닭이, 체질에 맞게 적당히 먹지 않아서다. 한창 의료봉사 많이 다닐 때 어느 언론에서 남편과 나를 두고 합천의 허 준과 예진아씨라고 하기도 했는데 우리 박물관, 허 준의 정신을 이어간다. 산청한의학박물관 등 다른 한의학박물관과 우리 박물관의 차이라면, 우리 박물관의 유력한 조력자, 자문위원이 내 남편인 한의사라는 점이다. 한의학 관련 사안이 있으면 바로바로 지원하고 문화예술촌과 박물관이 이만큼의 안정을 이루는데 큰 힘이 되었다. 지난해 우리 박물관이 우수박물관으로 선정되어 큰 상도 받았다. 앞으로 전문성을 살린 관광산업을 이끄는, 합천 항노화사업의 길잡이가 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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