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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작성일 2016-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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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정, “군민의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문화활동으로 그 보답을 하려고 한다.” ©임임분

 



자기소개를 해달라.

1941년 합천읍에서 나고 자랐다. 합천에는 아내와 둘이 살고, 아들은 외지에 산다.

지역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된 시작이 궁금하다.

집안에 농토 없어 농사도 못짓고, 내 또래는 병역자원이 많아 29살까지도 군 영장이 안나와 군미필 상태였는데, 당시는 군미필은 취직도 할 수 없어 30대 초반까지 변변한 직업 없이 지역에서 필경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다 지역에서 정치하는 사람 도와주면서 정치와 연을 맺어 정당 지구당 간부 일하면서 선거 때는 선거운동했다. 당시 신민당 소속이었다. 신민당은 유진산, 김영삼으로 내려오는 정파. 그러다 1979년, 11대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서울에서 4년 살았다. 그마저도 5공화국 들어서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12대·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다가(의·함·안 지역구) 떨어졌다. 두 번 낙마하니 생계는 더 힘들어지고, 14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후보가 아니라 박판제 후보를 지원했다. 그 선거에도 내 후보가 낙마하고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군수 직은 직접 주민과 맞닿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이 있다고 보고 군수 선거에 나갔다.

지역정치인으로 사는 동안 생계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아내의 고생이 심했다. 양파·마늘 캐러 다니고. 그 고생담이 선거할 때 밑천이 되더라. 삼가지역 합동강연 때 그 얘기하니까 5천여 청중이 울고, 경쟁 후보도 울고, 동정표를 많이 얻었다. 군수 직 맡기 전까지는 고정수입이 없었다.

34(1995.7.~1998.6.)·35대(1998.7.~2002.6.) 합천군 군수 직을 맡았다. 기억에 남는 일, 아쉬운 일은 무엇일까?

최선을 다해서 봉사한다는 자세로 일했다. 당시에는 우리 군은 농로, 농수로, 경지정리, 지하관정파기, 강둑정리 등 농업기반시설 마련이 가장 급했다. 그 일 하느라 바빴다. 우리 군이 넓어서 농로만 1천6백 킬로미터, 서울을 두 번 오가는 길이였다. 그 때 한 일로 지금 합천군의 농민이 농사를 짓고 있다. 더불어 여름철 황강축제를 시작했다. 물따라달리기, 백사장배구, 백사장씨름, 백사장축구 등을 했는데 합천의 여름이 무더워 여름행사가 참 어려웠다. 주관단체가 힘들어해서 종목을 줄여 지금의 황강레포츠축제로 이어지고 있다. 황매산철쭉제, 대장경축제, 벚꽃마라톤도 내 임기 때 시작했고, 생명의숲공원, 대종각, 삼일독립만세기념탑 등 강변부지 개발을 위해 땅 사들이고 체육공원 사용승낙 받는 일을 했다. 지금 황강변 체육문화공간을 보면 잘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후임군수(심의조:36·37대 2002.7.~2010.6.)가 지역에서 말썽이 많아 외지 사람에게까지 손가락질을 받게 된 일이 아쉽다. 군 행정을 할 때, 내 집 살림처럼 실정에 맞게 꾸려나가야 하는데, 심 전 군수는 무리해서 빚을 111억원의 냈다. 그렇게 만든 돈도 탈 없이 잘 쓰면 되는데 권 율 도원수부 터 사들이는데 쓰고, 있는 문화예술회관 활용하면 될 합천문화원 새로 짓는데 썼다. 그 빚을 그나마 하창환(38·39대 2010.7.~현재) 군수가 갚아서 다행이고.

요즘은 지자체장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보는데 당시는 어떠했을까? 게다가 민선 첫 군수에 대한 기대, 선호도는 어떠했는가?

나에 대한 기대가 컸다. 깨끗하게, 열심히 군수 직을 하기 바랐다. 반대로 내가 공직에 대한 경험도 없고 아는 바도 없는 사람이 뭘 하겠느냐 하는 입장도 있었다. 정치색을 띤 공무원은 여당 쪽에 기울여져있고, 공직사회에서 빛을 못보던 이들은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었고(인사 부분에서). 막상 임기 맡으면서 인사를 해보니 국회의원 입김에 요직(기획감사실, 내무과, 재무과)에 있던 이들을 확 바꿔버리니까 반발과 저항이 심했다. 공직사회는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고 본다. 공직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자문 받아 인사를 해서, 크게 무리한 일은 없었다고 보고, 당시 내 편이라는 사람도 없어서 정실인사도 할 수 없었다.

심의조 전 군수는 빚을 내서라도 사업을 벌인 셈인데, 하창환 군수는 공모사업을 따내는 일에 집중하면서 예산을 늘렸다. 이런 방식의 장단점이 있다면?

행정 경험이 많으니 예산을 따내는 방안을 잘 아는 하 군수다. 예전에 비해 그런 제도가 많기도 하고. 그 일도 군수 혼자 하는 일은 아니고 기획감사실 중심으로 군수가 행정 출신의 장점을 잘 활용했다고 본다. 우리 지역 출신 관계자들을 활용도 잘했고.

그런 방식이 결정적일 때 지역자치를 발목 잡는 한계도 있다.

그렇다. 아무래도 당적이 있으면 더 그렇고.

임기에 못한 사업은?

공약으로 내건 사업은 다했다. 기억에 남는 일은, 합천교육발전위원회 만드는 일, 이 일은 시작하는 일이 어려웠고 오래 걸렸다. 후임군수들도 같이 노력해줘서 가능했고. 어느 지역에 내놓아도 좋은, 성공작이다.

낙마한 36대 군수 선거 공약은 아쉬움으로 남겠다.

시간이 한참 지난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는데, 따로 공약이 있지는 않았고 많지도 않았다. 하창환 군수는 100대 공약을 내던데, 어떻게 그렇게 내는지 신기하다.

36대 선거 낙마 뒤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군수 직을 끝냈을 때 62세였다. 돌이켜보면 55세라는 한창 때 군수 직을 맡았다. 군민들의 사랑을 과분하게 받아 군수 직을 두 번이나 했고, 이 일은 영광스러우면서 빚이라고 생각한다. 남은 나날은, 군민에게 보답하자는 생각에서 지역에서 문화활동을 하고 있다. 미술협회 창립하고 첫 회장을 하고, 합천에 예총이 없어 다른 분야 모아서 예총도 만들고.

재임 시기에도 인구증가사업으로 거주지 옮겨 오는 사업을 했는가?

지금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다. 합천에서 돈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은 합천에 거주지를 두자는 얘기는 있었다. 가장 말 안드는 이들이 교육공무원들이었고. 요즘처럼 사람은 오지 않고 거주지만 옮겨 오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합천군은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나름의 묘안이 있다면?

이러다가 합천이 지탱할 수 있을까 걱정된다. 당장 어쩔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공단이 생겨도 그들이 거주지를 합천에 둘까, 그도 장담할 수 없다. 진주나 대구에서 출퇴근할 인력들이지. 내륙철도를 놓자, 포항 쪽으로 고속도로를 내자고 하지만, 그 일이 그나마 있는 인재를 밖으로 내놓는 일이 아닐까?

귀농·귀촌, 다문화가정 증가 외 인구증가 요인이 없는데, 그 사안에 남다른 지원을 하지도 않는다.

이 일이 가장 급하다. 실질적인 인구증가를 위한 투자, 중요하다. 파격 지원이 필요하다. 그들이 정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들어오는 이들도 관의 지원에 너무 기대면 안되고. 한쪽에서는 그런 지원이 헛돈 쓴다고 하지만, 유입장치는 필요하다.

합천군청 공무원 인사 공정성 논란, 인사에 노동조합이 개선을 위한 논의에 참여하겠다고 하니 인사는 인사권자의 고유권한이라 노동조합이 개입하는 일은 과하다는 입장도 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고 나 또한 가장 어려운 일은, 인사였다. 인사 잡음을 최소한으로 줄이자고 해도 군의회에서 특별한 성씨에게 특혜주고 특별한 성씨는 밀어냈다고 해서 한번은 내 취임 뒤 사무관 승진에 합천 이씨 몇 명, 어디 김씨 몇 명, 진주 강씨 몇 명이라고 얘기하니, 지적한 의원이 아무 대꾸를 못하더라. 내 임기에 가까운 이들이 도리어 손해를 보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임기 초, 노동조합 활동은 최대한 열어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공무원노동조합이 결성된다 어쩐다 할 때라 직원조례 때 노동조합 만들어서 활동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스스로 나서야 한다고. 그래 놓으니 도리어 몸을 사리더라. 용기를 못내더라. 할 얘기해라, 군정이 내 혼자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니까. 인사권자의 인사권이 불가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조합도 어느 정도 선을 놓고 해야 할 얘기는 하면 된다. 군수라고 직접 고과를 메기지도 않고, 실무진이 고과를 메기고 노동조합이 어느 정도 선에서 개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인사권자의 공정성 논란에 대한 부담도 줄고.

지역정치의 또 다른 한 축인 군의원들 활동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

내 임기 때만 해도 군의원들이 다 여당 쪽이었고, 군의원들의 이권개입, 군의원 이권겸직이 있어서 논란과 불만이 있었다. 그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군의원들 활동력은 요즘 의원들이 예전 의원들에 비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지자체장과 군의회 사이에 화음이 맞아야 한다. 지역정치를 하는 이들이 자기욕심을 비워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지역정치인 선배로, 후배들의 활동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도 궁금하다.

지자체장에게 당적이 있으면 아무래도 무소속일 때와 달리 일하기 어렵다. 정치개혁할 때 고려할 사안이다. 지자체장의 당적 문제, 선거 끝나면 나오는 얘기인데, 선거가 가까워지면 안나오는 얘기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고 노력하는 이들이니 알아서 하겠지 싶다. 그럼에도 공직자의 자세, 기본을 지키면 지역발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해공원’ 명칭 바꾸기, 아직 못하고 있다.

바꿔야 한다. 기회 있을 때마다 누구보다 열심히 얘기한다. 지금이라도 내가 군수라면 바로 바꾼다. 하 군수도 ‘군민이 원한다면 바꾸겠다’고 하지만, 못하고 있는 까닭은, 나름의 노림수 탓이 아닐까. 우스개소리로, ‘하 군수가 이번 임기로 군수 직 끝낼 생각이면 당장이라도 바꿀 수 있지 않나’ 하는데, 모를 일이다.

여가에는 무엇을 하는가?

시간은 많다. 혼자서 시간 보내기 좋은 붓글씨 쓰고, 내 나름의 향토사 연구를 한다고 자료 찾고 정리하고. 티비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아내와 같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본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이쁘고 부럽다. 올해는 노인대학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할 예정이다. 무료하게 보내기를 싫어해서 뭐든 한다. 사람도 만나고, <황강문화협동조합>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읍 종합사회복지관에서 틀어주는 영화 가운데 좋은 작품이 있으면 보러 간다. 영화를 봐도 나이가 들어 돌아서면 잊어버리지만. 이 나이 되면 눈에 띄게 득 되는 일에서는 한 발 물러나고 지역에서 좋은 일을 하는 이들에게 나 한 사람이라도 더 가면 도와주는 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같이 하려고 한다.

최근 채현국 선생 초청 강연이 있었다.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채 선생 강의 스타일이 좋더라. 혼자서 얘기하지 않고 청중과 묻고 답하면서 하는 강연은 강연자의 실력이 없으면 못하는 방식이다. 그런 강연자의 자질과 장점을 인정해주고 알아줘야 한다.

지역언론에 대한 나름의 생각과 조언이 있다면?

<황강신문> 창간 당시 ‘애향정론(愛鄕正論)’이라는 붓글씨를 건네기도 하고 그 글귀가 사시(社是)가 되기도 한 인연이 있어 투고도 했는데, 내 군수 임기 때 어떤 사건으로 서로 불화를 겪으면서 내가 ‘기사 실명제’를 하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김병화 전 대표가 운영할 때는 <황강신문>이 지역의 대표 언론이었다. 보도방향은 새 경영진으로 와서도 다르지 않은데, 지면 짜임새가 예전에 비해 썰렁하다, 엉성하다 싶었는데, 요즘은 좀 나아지고 있다 생각한다. 짜임새를 보면 <합천대야신문>이 좋고, 신문사가 사설을 제대로 쓰는 일은 어렵구나 싶다. <합천신문>은 사설을 내놓지 못하고 있고. 다양한 취재방향이 필요하다. 광고 유치도 적극적으로 해서 재정상태를 안정시켜야 한다. 그래야 신문도 잘 만들 수 있으니까. <황강신문>이 예전 그 명성을 되찾기를 바란다.

새해 바람이 있다면?

집이 황강변이라 걷기운동하기 좋아서 자주 걷는데, 걸어보면 기운이 조금씩 떨어진다는 생각은 한다. 지금처럼 문화활동하면서 군민들과 함께 하는 한 해 보내겠다.

독자, 군민, 향우들에게 새해 인사와 덕담을 부탁한다.

지난해 어려운 일이 있었다면 올해는 5만 군민, 30만 향우가 그 어려움을 떨쳐내고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 보내기 바란다.

임임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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