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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작성일 2016-01-12

죽죽마을의 ‘죽죽’은 신라시대 대야성을 지키다 순절한 죽죽 장군(竹竹, ?~642년. 신라의 화랑.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충신)이 탄생한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졌다고 전해온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봉산면으로 편입되었다가 1987년 1월 1일자로 합천군 용주면 죽죽리로 새로 편입되었다. 죽죽마을은 평지마을, 서운마을, 양지마을, 화남마을 등 4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합천댐이 들어서면서 평지마을과 서운마을은 수몰지구가 되었고 현재 양지마을과 화남마을만이 있다. 뒤로는 문가말랑봉, 동쪽으로는 호롱산, 북쪽으로는 서원봉, 서쪽으로는 무덤봉으로 둘러싸인 죽죽마을, 남쪽 신방봉 아래로는 황강이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며 마을 뒷산 너머에는 악경산이 있다. 남명 선생이 세우고 후학을 키우던 용암서원, 능성구씨 구치평의 재각(1949년 건립)인 죽양정, 구성희의 재각(1955년 건립) 화강재, 구성림의 재각(1994년 건립) 경선재, 남평 문덕성의 재각(1956년 건립) 죽산재가 이 마을의 주요 문화재다. 1월 7일(목) 오후, 죽죽마을 구정모 이장 댁에서 구 이장을 만났다. 아래는 그와 나눈 얘기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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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농 마을이라 공동으로 쓸 벼건조기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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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모, “앞으로 여가를 즐기고 싶다. 가까이에서 기타를 배우고 싶다.” ©임임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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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를 해달라.

1951년 죽죽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현재 마을에서 아내와 둘이 산다. 아들 둘은 각각 합천군청, 거제시 경찰공무원으로 일한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외지에 나갔다가 적응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기도 했고 군대 가면서 또 고향을 떠났다가 1984년에 고향으로 아주 들어와서 농사 짓고 산다. 현재 쌀농사, 마늘농사, 소 20마리 키운다.

젊어서 외지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은 어떤 선택이었을까?

장손이고 맏이라 집안의 기대가 있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에 대해 부모님, 아내의 반대가 컸다. 고등학교 마치고 군대 가기 전 서울에서 2년 살았는데 당시를 생각해보면 참 철이 없었다. 뭐 하고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생각도 없었고. 자랄 때 부모님을 비롯해 마을에 있는 분들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살 수 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등등 조언을 해줄 어른, 형, 누나들이 없었다. 골짜기마을에 티비가 있나 신문을 보는 사람이 있나, 뭔가 세상살이에 대해 고민하고 조언해줄 통로가 없었다. 운이 좋기도 했고 군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서 적응할 만 했다. 제대할 무렵 직업군인해보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사회에 나가 고생할 봐에야 군대가 낫겠다 싶어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하고 전방에서 6개월 복무한 뒤 부산으로 와서 2년 남짓 복무했다. 보직이 의무병과라 힘든 일은 없었다. 안정이 되니까 딴 생각을 하게 되더라. 아직 젊은데 이리 살아도 되는가, 뭔가 희망, 꿈이 있어야 한다, 도전을 해보자, 편한데 꽉 짜인 생활이 지루해서, 고향으로 가서 농사를 짓자고 생각했다. 안정을 우선으로 여긴다는 요즘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바보 같은 선택이지만.

그렇게 돌아온 고향살이, 어떠했을까?

당시 합천댐 건설이 예정된 터라, 나름으로는 뭔가 해볼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들어왔는데, 또 다른 상황이더라. 농촌에 살면 큰 돈이 필요하지 않겠지 했는데, 아니더라. 내가 열심히 하면 어지간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참 열심히 일했다. 부모님이 짓던 농사 같이 하고, 소 몇 마리 키우고, 당시는 다 그랬다. 친구도 모를 때라 밥 먹고 일만 했다. 2년 그렇게 하고 나니, 합천댐이 만들어지고, 길이 좋아지고, 이장 일을 해보라고 해서 이장 일 맡았는데, 마침 우리 마을이 봉산면 소속으로 마지막이던 때였고, 그 다음 임기가 우리 마을이 용주면으로 편입되고 처음 이장이라, 면으로 읍으로 다닐 일이 많았다. 행정업무가 많을 때라 내가 맡은 일이었지만 내 생활이 무너지는 단점이 있었다. 그 때 밖으로 돌면서 든 바람이 지금까지 오고 있다. 내 농사 지어야 하는데 밖으로 돌게 되고. 내가 놀기 좋아하고 분위기에 잘 휩쓸린다.

이장 경력은 얼마나 되는가?

현재 4년째하고 있고 30대에 3년 했으니 총 7년째다.

죽죽마을 현황은?

32가구에 48명이 살고 있다. 최연소 주민은 고등학생, 최고령 주민은 90대 초반 어르신이다. 48명 주민 가운데 70대 이하가 4명이다. 32가구 가운데 농가는 12농가다. 12농가 가운데 자립농은 4농가.

죽죽마을 현안은?

마을에 젊은이가 없어 큰 걱정이다. 비료 한 포 제대로 못드는데 농사는 지으려는 어르신들이 있으니까. 마을 주민 다수가 구씨 집성촌이고 내가 집안의 종손이라, 이장 아니어도 안챙길 수 없는 분위기인데, 참 묘하게, 집안 사람들이고 인구 수가 적어도 단합이 잘 안된다. 워낙 외지고 인구 수가 적어 경지정리를 하면 농사 짓기 더 편하지만, 경제성이 떨어져 할 수 없다. 대신 농로라도 정비하자고 해서 군에 요청을 해놓았다. 농사 짓는 이들 가운데 대다수가 소농이고 고령자라 공동 벼건조기가 필요한데,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인구증가성과가 좋으면 마을에 사업비가 나오니 그 돈으로 사려고 나름 노력했는데, 안되어서 아쉽다. 마을이 두 단위로 나뉘어 있어서 예로부터 화합이 잘 안되는 문제가 있다. 인구 수 적고 고령화되어 마을기업이니 뭐니, 마을 단위 개발, 발전 사업을 꿈 꿀 수 없다. 동네가 외지지만 그만큼 공기 좋고 경치 좋으니까 외지에서 들어오려고 땅이니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있고 실제 들어온 이들도 있지만, 땅 주인, 집 주인이 마을에 살지 않으면서도 팔려고 하지 않아 빈집, 폐가가 많다. 이 문제는 마을을 가라앉게 하는 큰 걱정꺼리다. 자기한테 필요하지 않으면 내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개인자산이라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마을을 위해, 고향을 위해 결단해주는 이들이 많기를 바란다. 외지에서 들어온 이들과 토착민과 마찰을 빚는 일도 있지만, 그런 일은 평생을 같이 산, 심지어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있는 일이니까 서로 노력하면 된다.

이장 일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나 어려운 일, 주민들이나 지역사회에 부탁하고 싶은 일, 당부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인구증가사업, 이장들의 가장 큰 고충이다. 연말되면 군에서 면에서 부담을 주는데, 나도 초기엔 친인척들 상대로 많이 독촉하고, 주민들도 외지에 나가있는 자식들, 친인척들 땡겨오고 했는데, 그도 한 해 두 해지, 8년 가까이 하고 있으니, 이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인구감소가 우리 군만의 고민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이 사는 지역에서도 인구유출입으로 고민이 있으니까. 이장들 만나 얘기해보면, 너도나도 이제 그만할 일이라고 얘기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 인구 줄어서 사업비 적게 받으면, 적은 대로 살자고 한다. 나라에서 받은 사업비, 다 우리가 낸 세금 아닌가. 세금으로 받아낸 사업비, 군에서 알차게 쓰고 있는가, 거품도 있다. 군민이 줄고 있는데, 군 실·과가 줄어야 되는 상황이면, 공무원 수도 줄어야지. ‘눈가고 아웅’하는 인구증가가 아니라 실제 귀농·귀촌 증가를 위한 고민을 해야 한다. 빈집·폐가, 놀고 있는 논밭에 세금을 더 물려서 유입민들에게 유리한 기반조건을 만들자 등등 실질적인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수년째 합천댐관리단에서 지역민들 대상으로 하는 사업으로, 주 5일 지역 어르신들 모시고 가서 여러 프로그램에 식사제공하고 또 모셔다 드리는 일을 하고 있는데, 지역 어르신들의 호응이 좋다. 가끔 외지로 여행도 가고. 마을 이장으로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역에서 하고 있는 사회활동이 있다면?

예전에 새마을지도자, 바르게살기, 영농후계자, 농촌지도자를 했다. 덕분에 많이 어울려 다녔다. 어울리면 못빠져나오는 성격 탓에 마누라 고생이 많았다.

새해다. 지난해 평가와 올해 계획이 있다면?

지난해 농사, 괜찮았다. 소 시세도 괜찮았고 마늘가격도 나쁘지 않았고. 쌀값이 제값을 못받은 일은 큰 걱정이다. 쌀은 가격 떨어지는 일 못지않게, 쌀이 천대받는 현실이 안타깝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쌀은 우리 생명줄이고 우리 역사인데, 기본이 흔들리고 있다는 일은 참 걱정이다. 식량문제는 기상이변까지 생각해야 한다. 당장 경제성 떨어지고 여유 있다고 제쳐놓으면, 그렇게 무너지면 나중에 다시 원상복귀시키기 어렵다. 쌀 재고가 많아서 사료로 쓴다면서 밥쌀을 수입하는 상황은 정말이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 안되는 일이다. 21세기에 생산과 소비를 조율하지 못한다는 일도 이해 안되는 일이다. 정부의 관계자들, 농협의 관계자들이 얼마나 똑똑한가? 그 똑똑한 사람들이 못하는 일이라니, 이해 안된다. 수지타산이 10% 안팎에서 오르내리는 일은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무슨 도박도 아니고, 50% 선에서 손익이 너울을 타면, 투기자본이 농업을 죽이는 조건이라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 양파가격이 좋으면 양파로 몰리고, 그러다 다 같이 망하고. 21세기에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답답하고 한심하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땅이 있으니 농사 짓는 소농들, 농사 뼈 빠지게 지어봐야 농약방, 농기계상들 먹여 살리는 짓일 뿐이라는 한탄을 하는데, 정부나 농업 관련 책임자들은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농민이 안정적인 영농계획을 세울 수 있는 바탕을 꼭 만들어주기 바란다. 그래야 농촌에 사람이 몰린다.

1월 12일에 농협중앙회 회장 선거도 있고 올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예비후보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농민이자 농촌지역에 사는 유권자로, 지역정치인들과 정책과 사업을 책임지는 권한이 있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 당부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선거운동 때 했던 숱한 공약처럼 하고 있다, 국민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당선되면 어김없이 자기 이익, 자기네 계파 이익을 위한 일에 골몰하는 꼴을 우리는 보고 있는데, 그 책임은 결국 국민한테 있다. 우리가 잘해야 한다. 매번 속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제대로 뽑고 제대로 일하도록 감시하고 이끌어야 한다. 경상도니까 새누리당, 전라도니까 민주당 하는 식으로는 안된다. 지역에 필요한 인물을 잘 헤아려 공천하고, 뽑아주고, 또 뽑힌 사람은 일을 잘하도록 믿어주는 자세도 필요하다. 지가 찍어줘 놓고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일도 웃긴다.

여가에는 무엇을 하는가?

예전에는 이런저런 운동도 많이 하고 지역 동호인들과 활쏘기도 했는데 지금은 팔이 아파서 못한다. 음악도 좋아해서 기타를 배우고 싶은데, 마을에서 읍까지도 매일 나가는 일이 어려우니까 못한다. 소를 키우니 부부가 함께 여행을 갈 수도 없고. 고향에 와서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1997년 경제위기 때 빚이 생겨 고생도 했다. 이제 자식한테 돈 들어가는 때도 아니고, 차차 일을 더 줄이고 여행을 하거나 여가를 즐길 생각이다.

누군가, ‘행복한가, 살만한가?’라고 묻는다면?

행복하다. 돈 여유가 좀 더 있으면 좋겠지만, 이만하면 살만하다.

지역언론에 대한 평소 생각이나 당부하고 싶은 일, 조언이 있다면?

일에 치여 꾸준히 꼼꼼히 살펴보지는 못하지만 짬이 날 때 보면, 지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문을 보고 파악한다. 앞으로도 지역을 담아내는 일에 열심히 해주기 바란다.

임임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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