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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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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인 금은은 1394(태조 3) 태조 이성계가 한양의 낙성식에서 거문고를 타줄 것(彈琴)을 청했으나 전왕(前王)의 연석에서도 탄금을 고사했는데 지금 왕의 청을 받아들이면 무슨 면목으로 선왕을 지하에서 뵙겠습니까.”라고 거절했고, 1399(정종 1) 정종이 손수 쓴 편지인 수찰(手札)을 내려 태조의 초상화(御眞)를 그려달라고 한 것도 공민왕의 어진 요청에도 불응했다.”는 이유로 거절해 옥에 갇혔다. 태조가 이 사실을 알고 석방하라고 하여 풀려난 후 군북면 원북리에 은거했다. 금은은 군북면 명관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가야읍의 유명한 관광지인 무진정의 조삼(趙參)이 그의 후손이다. 금은보다 먼저 판도판서(版圖判書)였던 만은은 합천 삼가현 두심동(杜心洞) 운구(雲衢)에 숨었다. 교리(校理) 하옥(河沃)은 만은의 행장(行狀)을 쓰면서 공은 인품이 뛰어나고 민첩한 선비를 따라서 신왕조의 서울에 와서 제사 지내는 일에 도우지 않고서 다만 겨울철에도 시들지 않는 송백(松柏) 같은 절개(節慨)를 지키고는 산 속에 파묻혀 살다가 별세하였다고 적었다.

모은 이오는 함안 괴산에 사는 전서(典書)였던 금은과 더불어 운구에 왕래하면서 만은과 함께 시사(時事)를 근심하고, 시를 지으며 교류하였다. 조열의 후손이 편집한 금은실기(琴隱實紀)에 있는 만시(挽詩)는 망국의 한을 품고 고향에 돌아와 서로 의지하다 먼저 죽은 금은을 애도하며 친구 모은이 쓴 시이다. 금은 실기는 금은이, 조선 조에 와서도 절개와 지조를 굽히지 않으면서 태조와 정종의 요청을 거부했던 여러 가지 사실들을 상세히 기록한 자료이다.

생전에 사이좋게 지내던 3총사는 죽어서도 서당 옆에 조성해놓은 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다. 비석군으로 올라가는 계단 양쪽에 배롱나무가 있다. 금은과 모은의 유적비는 높이와 크기, 모양이 같고 문정공(文貞公) 만은은 유허비라는 이름으로 거북이 받침에 조금 크게 세워져 있다. 나란히 있는 비 가운데 만은의 비가 가장 최근인 2,000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본래 이 자리에 있던 유허비는 다른 두 분의 비와 크기, 모양이 같은데 길 건너편에 있는 만은 부부의 묘에 같이 있었다. 

가장 오래된 유허비는 운구대 바위 위에 글자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만은의 유허비는 현재 3개이다. 서당 맞은편에 있는 운구대는 마을 뒤편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작은 동산이지만 심산유곡의 기암절벽이 갖추고 있는 건 다 있다. 아담한 동산 위에 고목 두 그루와 이끼 낀 커다란 바위와 돌들이 모여 있다. ‘운구(雲衢)’의 뜻은 구름 갈림길이라는 뜻이다. 세 분은 이곳에 앉아서 조용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서로의 마음을 달랠 때 그 아픈 시간을 함께 했을 고목과 바위에서도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운구대에서 마을 전체가 내려다 보인다.

 

전점석(경남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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