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933-7463

뉴스

작성일 2016-08-30

방송과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보조출연자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는 대병면 성리3구마을 출신 경기도 안산 향우, 문계순씨를 825() 오전,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만났다. 아래는 그와 나눈 얘기다. - 임임분 기자​


2b477d263e91d7ebd29f88cf0a24ed06_1492753504_99416.JPG
자기소개를 해달라.

1955년에 대병면 성리3구마을, 오동골에서 나고 자랐다. 19712, 대병중학교 졸업과 함께 서울로 와서 방직공장인 대한모방에서 일하다, 당시 노동조합 활동을 하던 이들을 만나면서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원풍모방으로 일터를 옮기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처음 하게 됐다. 현재 한국노총 소속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위원장을 맡고 있고,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에 살고 있다. 딸 둘, 아들 하나가 있고.

 

보조출연 일은 어떻게 하게 됐고, 조합 활동으로 어떻게 연결됐는가?

원풍모방에서 일할 때 자연스럽게 산업선교회도 알게 되어 다양한 사람과 많은 활동을 했다. 원풍모방이 지방으로 공장을 옮기면서 회사도 나오고 결혼하면서 주부로, 남편이 하는 사업 함께 하면서 살았고 2006, 쉰 살이 되면서 가정사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게 되니 새로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에 일을 알아보다가, 생활정보지에서 보조출연 구인광고를 봤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과 어울려 얘기하기 좋아하는 기질도 있고 수입도 월 수입 2백만원을 보장한다 하고 나이 많아도 괜찮다고 해서 전화했더니, 바로 일하러 가자고 해서 간 현장이 한국방송 드라마 <서울 1945> 촬영장, 합천영상테마파크였다.

막바지 촬영 중이라 전쟁 씬, 피난민 중 한 명으로 투입됐다. 당장은 낯선 현장이 재미있었고, 촬영장이 고향이라 더 좋았다. 타지에서 고향나들이가 쉽지 않을 때라 더 그랬다. 촬영 3일만에, 현장의 열악함에 너무 놀랐다. 방직공장에서 일할 때 노동기본권을 쟁취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했고, 그 뒤 25년이 지났고, 이젠 한국의 노동현실도 많이 좋아졌으리라 생각했는데, 더구나 방송 일이고, 방송 중에서도 공영방송국의 촬영현장이라 더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포로수용소, 죄인을 모아놓은 곳과 같았다.

72시간 내내 쪽잠 자면서 촬영을 해야 하는 고단함에다 심각한 언어폭력이 난무한 현장에 너무 실망했다. 일 마치고 50명 남짓한 동료들과 새벽에 서울 여의도로 왔는데, 두 시에 우리를 내려놓고 가니 꼼짝없이 노숙자처럼 대중교통이 다니는 아침까지 모여 있게 됐다. 24시간 일하면 3만원 받는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시간에 택시를 타고 귀가를 하겠는가? 참았던 답답함과 노여움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신성한 노동,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기본 노동조건만 해결되면 우리가 더 즐겁게, 긍지를 품고 할 수 있는 일인데, 어떻게 이런 대접을 받고 일할 수 있느냐? 이렇게 살면 안된다. 개선하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얘기를 꺼냈다. 처음엔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이 여긴 원래 30~40년 동안 이래 왔다. 처음 와 봐서, 뭘 몰라서 저런다.”라고 얘기하더니 내 나름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을 위한 방법을 얘기하니 슬슬 동조하는 분위기가 됐고 함께 뭔가 해보자는 뜻을 모은 사람들 연명서까지 그 새벽에 만들었다. 그날 아침 다시 모인 8명과 함께 여의도에 있던 한국노총에 가서 상담하고,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해서 조합 설립신고하고 필증 받고 조합설립 보고대회하고, 여기까지 왔다.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이전에 보조출연자들의 노동조합은 없었나?

없었다. 연기자노동조합은 있지만. 2006, 그렇게 만든 조합에 500여명이 조합에 가입하는 열의를 보였다. 가입대상 규모는 전국으로 보면 20만명, 여의도에만 10만명이었다. 여의도엔 지금도 10만명이나 된다. 보조출연 일은 누구든, 언제든, 나이 제한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현재 생계형 보조출연자도 25백명은 된다.

 

조합 활동의 성과, 과제를 얘기해달라.

4대째, 연임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내가 좋아서, 잘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조합이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증거다. 그럼에도 11년째 조합의 성과라면, 개인사업자로 되어 있던 보조출연자를 노동자로 인정받는 일을 해냈다. 그 과정, 개별 산재 인정을 받는 일이라 참 어려웠다. 드라마 <각시탈> 촬영 때 보조출연자들이 탄 버스가 합천 대병에서 사고를 당해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나오는 등 산재 사고가 숱한데, 사고 건건마다 대응하는 일이 어렵고,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모든 보조출연노동자에게 노동자성을 부여해서 산재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투쟁을 했고, 2013101일부로 인정받게 됐다.

그 외 근로기준법이 인정하는 각종 임금기준과 수당 등을 요구하는 투쟁을 해서 24시간 일해도 3만원 받던 현실을 이젠 이런저런 수당 다 모아보면 20만원(원거리 이동, 대기시간 등)은 받는 여건을 만들었다. 5개월 싸운 끝에, 한국방송 별관 주차장에 단독 대기공간을 확보했다. 한 번에 50명 정도 들어가 누울 수 있는, 냉난방시설 있는 방 세 칸짜리다. 세면장·화장실은 따로 없어서 한국방송 별관 시설을 이용하게 되어 있다. 이마저도 처음엔 24시간 이용이 아니라 대중교통이 없는 밤에만 쓰라고 했는데, 3년 투쟁해서 24시간 쓸 수 있게 합의, 현재 잘 쓰고 있다.

현장의 언어폭력도 줄어들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제한된 시간에 일을 해야 하는 방송현장 특성에 언어폭력이 없을 수 없지만, 새파랗게 젊은 연출부가 이모·아재뻘의 보조출연자들에게 , 너 이리와!”, “저 새끼 뭐야, 저리로 가라고 해!” 등 사람을 무슨 개·돼지 다루 듯, 분명한 폭력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심지어 그 현장에 낯선 이는 , 니는 몇 살인데 말이 그 따구야?!”하고 항의하거나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끝까지 싸워 개선시키지 않고, 다시 현장에 나오지 않으면서 유야무야되는 일이 오래 되풀이되면서, 고질적이고 흉한 관행이 된 상황이었다. 불안정한 노동시장인 보조출연계 특성 탓이다. 같은 얘기라도, “이모, 나오세요!”, “삼촌, 들어가요!”라고 하는 일이 뭐 그리 어렵나? 이 현실을 바꿔보자고 해서 언어폭력 쓰는 당사자를 조합원이 경찰에 고발하고, 고발 당하니 당사자가 언어폭력 쓰는 일을 조심하게 되고, 이젠 언어폭력을 무심결에 쓴 사람도 , 실수다. 미안하다. 조합에 얘기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식으로, 예전에 비하면 좋아졌다.

 

조합, 안정기인가?

불안정하다. 아직 살얼음을 걷는 중이다. 무엇보다 조합이 생기면서 임금이 올라가고 현장반장에 대한 현장의 대우가 달라지니 보조출연노동자의 조합에 대한 관심, 필요함, 고마워하는 마음도 늘었지만, 건설현장 일용직 일처럼, 보조출연 일도 노동자에 비해 일거리가 적으니 수입이 일정하거나 안정적이지 않아 조합비를 내는 최소한의 조합원 의무를 다하는 이가 많지 않아, 조합 결정 11년차지만, 조합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어느 조합에나 있는 문제지만, 조합이 만들어지고 조합이 성과를 내서 조합원에게 혜택을 주고 나면 조합에 대한 의무에 소홀해지기도 하고, 뒤늦게 조합에 들어온 조합원은 조합이 주는 혜택만 받으려 하고 의무는 부담스러워하거나 회피하기 마련이라, 꾸준히 교육하고 개선해나가려고 노력한다. 조합원 중에는 일거리를 더 받기 위해 일을 주는 이에게 상납을 하기도 하니 정상적으로 일을 받는 이는 더 어려워지는, 조합원들끼리의 경쟁과 연대도 고민이다. 조합원에게 사용자들이 일거리를 주지 않는 등 보조출연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은 여전히 확보되어 있지 않다. 조합이 하고 있는 관련 재판만 여러 건이다. 그래서 전태일 열사가 외쳤던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를 걸고, 조만간 국회 앞 1인 시위를 할 예정이다. 조합의 장기 발전을 위해 조합이 근로자공급허가를 확보해야겠다 싶어서 관련 절차도 밟고 있다. 불법파견 중인 기획사(사용자)들이 막고 있지만, 꼭 해내야 하는 일이다. 박근혜 정부가 일자리, 복지를 약속했으면서 정작 정부가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타지에서 고향 합천을 생각하면 어떤 마음인가?

나는 참으로 고향을 사랑한다. 핸드폰 통화연결음도 한 현의 내 고향 합천이다. 어릴 땐 아버지의 고마움을 몰랐는데, 그 시절 산골에서 딸들까지 공부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그 어려운 시절에도 대학 나오면 손톱 밑에 흙 안넣고 살 수 있다, 33녀를 낳고 아들들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치셨다. 공부에 대한 열정이 상당히 높은 분이었다. 오동골에 또래가 33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4명만 중학교를 갔을 정도로 어려웠다. 그렇게 서울에 와 보니 중졸 학력이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나한테 고향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처럼 귀하다.

 

향우회 활동도 하는가?

재경대병면향우회, 재경대병중학교동문회, 재경황매산악회에서 10년 넘게 활동하고 있다.

 

향우들의 모임, 고향사랑은 알겠는데, 합천에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사랑이 다소 부담스럽거나 이기적이라는 느낌도 있다.

아직까지 향우연합회 임원진이나 집행부가 아니라서 그런가, 그런 분위기는 잘 모르겠다. 그저 서울에서 열심히 서로 챙기면서 지내니까, 좋기만 하다. 고향의 어려움에 대한 생각까지는 아직 못하고 있다. 우리끼리는 참 잘 지낸다. 최근에 가보니, 해인사, 황계폭포, 합천영상테마파크를 하루 일정으로 돌아볼 수 있더라. 합천까지 가는 일이 멀어서 그렇지. 합천에서 가장 낙후된 곳이 대병면이라 안타깝다. 합천에 5대 명산이 있어 좋은 정기를 잘 받아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오는데, 그 인재가 다 외지로 나가서 그런가? 재경합천군향우회는 이제 후배들에게 운영권을 물려주면서 세대교체도 하고 있어 더 분위기가 좋다. 카톡방이 늘 문전성시, 화목하고 활발하게 활동한다. 올해 산악회 산신제에는 180명이 참석했고.

 

10년 뒤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앞으로 10년 더 조합의 안정을 위해 일할 생각이다. 조합 안정되면 평조합원으로 돌아가, 은퇴 없는 우리 일 특성 잘 살려서, 좋아하는 일, 건강하게, 오래, 즐겁게 일하고 있으면 좋겠다. 더 이상 움직이기 어려운 나이가 되면,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평생을 살아오셨던 이소선 어머니처럼, 우리 조합의 은빛모임’(80세 이상자 모임)에 들어가, 조합원의 한 사람으로, 조합 발전에 나름의 기여를 하는 노후를 보내고 싶다.

 

여가활동은 무엇을 하는가?

따로 없다. 손주들이 하나씩 태어나니 요즘 주말은 할머니 노릇하느라 분주하다. 나 또한 주부이기도 하니 집안일도 쉬는 날은 해야 하니. 오동골에서 대병중학교까지 20리를 걸어 다녀서, 타고 난 체력은 좋다.

 

행복한가?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어릴 땐 가난해서 어렵고, 방직공장 다닐 땐 일이 힘들고 가정사에도 다사다난한 일이 있어 어려웠고 조합 만들고 활동할 때도 어려운 일이 숱했는데, 그에 비하면 지금은 좋다.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예전에 고향신문을 보다가 2년 전인가, 황강신문도 류재권 선배(본지 서울 통신원) 통해 보게 됐는데, 마음처럼 꼼꼼히 보는 편은 아니라 미안하다. 지지난해 5월인가, 고향 오동골에 가서 마을 분들 대접하는 모임을 했는데 다시 해보자는 의논을 하고 있다. 더불어 고향에 바람이 있다면, 오동골 고향집 앞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못의 연꽃이 참 좋아서 동네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놀이터이자 다른 곳에서도 보러 올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최근에 가보니 그 못이 그 시절의 풍광을 잃어가고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에, 그 못을 마을자산으로 다시 살리고 싶은 마음에 알아보니 집성촌 마을이라 마을주민이라고 해도 친인척이고, 소유권 문제 등 정리할 일이 있는데 쉽지 않아 고민이 많고 걱정이다. 재실복원사업과 더불어 연못정돈도 더불어 복원되면 참 좋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