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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작성일 201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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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한봉수

 

오월은 가정의 달이다. 국가에서 인정한 이십여 기념일을 품고 있고, 그 중에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입양의 날, 가정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 가정과 관련된 기념일이 많아서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도 한다. 모두가 애정 품은 사연으로 정해진 기념일이다.

 

일제 치하의 고통과 한국전쟁을 넘기면서 낙후된 국가적인 숙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산업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될 때, 노동자의 권익신정을 위하여 정한 기념일을 노동절로 하였다가 근로자의 날로 명칭 변경이 된 것이랑, 역시 일제압박으로 인권이 등한시 되던 시기에 조국의 미래는 어린이에게 있으니 희망을 고취시키고자 소파 선생님이 정한 어린이날 등등 모두가 의미가 깊은 명절이라 할 수 있으니 사연 없는 기억이 있겠는가?

 

국가적인 기념일 뿐만 아니라, 그리운 내 고향 도곡마을의 향우회잔치나, 면민 단합 체육대회가 역시나 5월에 자리 잡고 있어 고향을 더욱 많이 생각하게 된다. 조국 근대화의 일환으로 건설된 합천댐으로 인하여 고향을 떠난 친척이 너무나 많다.

 

명절에 조상님들께 올리는 차례를 모시기 위하여, 아침식전부터 시작하여 집안의 많은 집들을 돌면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도록 추모 행사를 행하였던 우리 韓門(한문)의 집성촌이었던 도곡(都谷)마을에는 이제 몇 가구 정도 밖에 없다. 어머님이 인천으로 가시고는 발걸음을 뜸하게 하던 고향을 일전에 방문하게 되었고, 마침 친지에게 전화를 할 요량으로 봉산면 이장단에서 발간 한 전화번호부를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섭섭함을 느꼈다. 어쩜 망국한 고려의 수도 송도를 방문한 조선(朝鮮)의 은둔 선비의 심정이랄까? 오촌 숙부 한분의 함자 외에는 우리 성씨의 이름이 없었다. 아니 이럴 수가?!

 

저려오는 가슴을 진정하고 찬찬히 살펴보니, 수십 명도 넘는 그 많던 숙부님들이 하늘로 가시고 숙모님들의 이름으로 인쇄되어 있어서 일견 그렇게 보였던 것이었다. 미망인의 이름으로 숙모님 서넛 분이 고향에 살고 계심을 새삼 알게 되었고,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안부조차 하지 못했던 미안함으로 얼굴이 붉어져 저녁놀만 바라볼 수밖에. 아버님 유택을 돌아보면서 솟아오르는 그리움을 하소연 할 대상을 못 찾던 筆者(필자)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홀로 앉아 보니 삼포숙모님집이 보인다.

 

문득 초동시절의 그림이 눈앞에 어린다. 대대로 종손이시면서 두 대를 외동으로 내려오셨던 筆者의 증조부 각헌(:覺軒)할아버님께서 자제분을 팔형제나 두셨으니 고향 마을이 집성촌이 되었던 것이고, 따라서 당숙(堂叔)20명도 넘으니 택호(宅號) 외우기도 힘들었었다.

 

당시 풍습으로 환갑을 지나면 어른(노인)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어지는데, 삼포 숙모님에 대한 가장 오래된 추억은 이십을 겨우 지난 그야말로 새댁이셨을 때다. 지금이야 전문화된 장례식장에서 고별식을 행한다.

 

그러나 필자가 초등학교 입학 전후의 기억이라 아름아름하지만, 증조할머님의 장례식은 하이얀 찔레꽃이 피어있던 계절이었고, 구순(九巡)을 넘긴 호상(好喪)이었으며, 옛 풍습인 7일장이었기 때문에 꽃상여가 나가는 수일 전에도 멀리서 오신 조문객들이 온 동네에 많이 계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조석으로 례를 올리며 손녀들과 손부(孫婦)를 포함한 오십 여명도 넘는 안상주들의 울음소리는 슬픔보다 오히려 오케스트라처럼 아름다웠으며 많은 사람들이 웃으면서 호상이네 호상이야.”라고 말씀들을 하셨던 것 같다.

 

필자가 기억하는 것은, 삼포 숙모는 고모(姑母)들과 같이 소리 내서 우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바쁘게 무엇인가 일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는데 , 당시는 우리 집안의 막내며느리면서 집안에서 긴 세월을 증조할머님의 병 수발을 하셔서 그러했을 것이라 짐작을 한다. 세월이 오십년 가까이 흐른 지난해까지도 삼포 숙모님은 집안의 일이나 마을향우회 잔치에서 많은 일을 도맡아 하고 계심을 볼 수 있었다. 당숙모 중에 삼포숙모보다 젊은 분이 몇 분 계시지만, 모두가 도시에서 살고 있으니 칠순을 넘긴 연세에도 역시나 막내 역할을 묵묵히 하고 계시는 듯하다. 마을 회관에서 장고(杖鼓)를 수없이 반복하여 연습하시던 모습과 마을 전체 야유회를 가서도 정작 당신의 여흥은 뒷전이고 손위 동서되는 소위 형님 모시기에 최선을 다하시던 모습이 가슴을 따뜻하게 하여준다. 외람되게도 어머님이 고향 마을에 계실 때는 숙모님의 존재를 깊이 생각 하지 않았다.

 

구십을 내다보는 어머님의 건강을 염려하여 소일거리 농사일마저 딸네집의 화단 닮은 텃밭에서 하시도록 해드리면서, 어머님이 고향을 비우게 된 지금에서야 삼포숙모님이 묵묵히 집안을 지켜온 어른임을 알게 되었다.

 

시집 오실 때의 풍습이라면 최고 상노인인 칠순을 훌쩍 넘기시고도, 오십 여년을 막내 아닌 막내며느리로 집안을 지켜주신 삼포 숙모님께 다리 아픈 것 잊고 오래오래 살아 주십소서.”라고 간청을 드려본다. 글쟁이 조카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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