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7-08-22
내가 합천에서 문학강의를 하게 된 것은 이동실 수필가 때문이다. 몇 년 전 어느 수필전문지 행사에서 만난이후 우리 창작교실 문우들과도 가깝게 교류하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느닷없이 나의 수필강의를 듣고 싶다는 제의를 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물론 애써 못들은 척을 했다. 호의는 고마우나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음이다. 합천에서 저녁시간에 대학이 있는 마산으로 내려오는 일도 그렇고, 내가 합천까지 가서 강의를 마친 후 차를 몰고 내려오는 일도 어불성설 이었다.
다시 세월이 흐른 3월 마지막 주쯤, 무학산의 진달래 산행을 하고 있는 중에 이 수필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합천에서 수필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선생님들이 열 명 정도나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직접 한번 와보고 최종결정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내용에는 진지하고 엄숙함까지 묻어났다. 그 곡진한 청을 거절할 어떤 명분도 나는 찾아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한번 가보겠다고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부딪쳐 보기로 했다. 시력이 부실한 문제가 있으나 시간이 더 지나면 봉사활동 조차도 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봄꽃이 천지에 분분하는 4월3일 월요일 오후 5시, 합천으로 차를 몰고 달렸다. 연둣빛 산야가 다투어 손을 흔들며 환한 웃음으로 격려해주는 것만 같았다. 의령을 지나 대의로 접어들자 수년전 지리산을 오가던 길을 만난다. 당시는 좁고 굴곡진 국도와 높은 고개로 매우 힘든 구간이었는데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정비되어 있다. 큰 고개도 터널이 뚫려 순식간에 접어든다. 대의에서 가회, 삼가, 쌍백, 대양 등의 정겨운 이정표를 지나 황강을 건너 합천까지 들어가는 길도 직선으로 이어져 무리가 없었다. 80킬로 거리에 딱 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약속장소인 공부방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려 20명 가까운 선생님들이 방안을 꽉 메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문학의 이름으로 사람을 모으기가 쉽지 않은 시대, 커지 않은 고을에서 이처럼 많은 분들이 문학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의장님, 교육장님, 국장님, 실장님, 지부장님, 작가님, 간호사님을 포함 합천군의 주요한 분들이 거의 자리를 함께 한 것 같았다. 분명한 것은 이분들이야말로 대가야의 터전위에 세워진 고도 합천을 지키고 가꾸어 오신 뿌리라는 사실이다. 이고장의 아름다운 자연과 빛나는 문화유산을 지켜 오신 자랑스러운 주역이었다.
초계에서 오셨다는 한 선생님의 소개가 이어지자, 나의 의식은 까마득한 유년의 뜰로 허위허위 걷잡을 수없이 달려만 갔다. 진등재에서 바라본 세계의 중심이 초계들판 이어서일까. 그것은 나의 본적이 합천군이기 때문이어서 일거다. 원적도 합천군이 맞다. 태어나 초중고대학을 마치고 군에서 제대를 할 때 까지도 나의 소속은 합천이었다. 소년시절에는 우유배급을 받으러 진등재를 넘었고, 대학체력장 시험을 합천읍에서 치렀으며,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와 예비군 동원훈련까지도 합천에서 받았다. 합천을 가기 위해 진등재를 넘을 때는“서으론 황매산성 동으론 낙동, 쓰고 남아 쌓이도록 기름지구나. 내 고향은 합천 땅 열일곱 집이 한식구로 모여서 번영 하는 곳”이라는 군가를 소리 높여 부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그곳은 성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3년 생활권 중심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내 고향 머릿골은 합천군 적중면에서 의령군 부림면으로 편입이 되었다. 그때 나이 갓 서른, 의식이 완전히 굳어지고 난 뒤였다. 그 이후 많은 세월을 합천사람도 의령사람도 아닌 채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향이 의령으로 완전히 적응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 십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의식 한 켠 에서는 합천사람으로서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한없이 이 분들에게 끌리며 그 속으로 동화되어 갔다. 그립고 그리워서 찾고 또 찾았던 본향을 만나 그 안에서 망연히 유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득한 환몽 속에서 이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매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면에서 갈구하던 의식 저 밑바닥의 마지막 뿌리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영혼은 이미 본향의 중심에서 마음껏 물장구를 치고 있었음은 아닐까. 나에게 합천은 그런 의식 밑바닥의 원형이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첫 수업이 꿈결처럼 끝났다.
내려오는 길도 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물리적인 시간이었을 뿐 정서적으로는 그에도 훨씬 미치지 못했다는 말이 맞다. 마음이 먼저가 있을 때도 있다. 그렇게 매주 월요일이면 합천으로 가고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 지리산 반야봉에서 철쭉의 끝물에 한창 취해 있는데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함께 공부하며‘이주홍어린이문학관’이사로 있는 정순한 수필가다. 나의 강의를 문학레지던스사업 지역민을 위한 문학강좌로 이어가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다. 이미 내 뜻은 없는게 아니냐고 말했다. 이제 합천이 낳은 불세출의 문인 향파 선생님까지 만나며 합천을 오르내리고 있다. 이 인연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 갈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함께 문학공부 하는 선생님들이 모두 꿈을 이루어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게 될 것이란 믿음이다. 합천을 환히 밝히는 횃불 같은 문인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돈독한 문우로 교류하며 창작의 기쁨과 고통까지 함께 나누고 격려하는 벗이고 싶다. 그렇게 합천의 이름으로 한 뿌리가 되고 무리가 되고 싶다.
*백남오: 수필가, 문학평론가. 2004년《서정시학》수필, 2015년《수필과 비평》평론등단. 고교 국어교과서에 수필「겨울밤 세석에서」수록. 고교문학교과서(지학사) 공동저자. 수필집『지리산 황금능선의 봄』『지리산 빗점골의 가을』『지리산 세석고원의 여름』 경남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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