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8-01-09
정순한
수필가
1
진달래가 피었다.
습자지보다 더 얇은 진달래꽃은 어른이 된 지금도 아련한 슬픔을 불러오는 꽃이다. 진달래가 필 무렵이 내 친정아버지의 기일이다. 그날이 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리움과 함께 후회 또한 깊어진다. 왜 곁에 계실 때 아쉬움 남지 않게 잘 해 드리지 못했을까. 모든 인간관계가 다 그렇다지만 부모 자식 관계는 더욱 지내 놓고 나면 회한만이 남을 뿐이다. 진달래 꽃말이 ‘절제’ 라는 걸 알았을 때, 어머니의 인생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버지보다 늦게 세상을 등지신 게 무슨 큰 죄라도 되었을까. 온 몸을 던져 자식을 위해 버텨내신 내 어머니 몫의 아픈 삶. 두고두고 내 삶의 강건한 버팀목이었다. 이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으랴. 진달래가 온 산을 붉게 수놓을 때면 내 가슴이 아려온다.
2
하늘엔 뭉게구름이 탐스런 꽃송이를 만들며 유유히 흐르고 있다.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이 그곳에 있다. 아, 그저 그냥 그렇게 조건 없이 구름을 닮고 싶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육체의 어느 부분에 붙어 있는지 모르는 탓에 번잡한 모양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면 어깨나 팔목의 통증과는 달리 어떻게 처리 할 길이 없나보다. 흔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시간이 해결 해 준다고들 얘기한다. 시간은 세월을 의미하기에 과거를 잊게 해 주는 묘약인가보다. 그렇다면 가슴에 난 상처의 아픔도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면 흘러가는 시간이 치유해 줄 법도 하다.
눈앞을 가로막는 동네 야산이 정겹다. 사철 다른 모습으로 날 바라보는 산을 보면서 시간이 마냥 덧없이 흐르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본다. 제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살아가는 과정에 어두운 그림자 한 둘은 끌어안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늘과 땅은 한없이 여유롭고 제 멋대로 태평하기만 하다.
3
가을들녘을 고즈넉이 바라보다가 문득 삭막해질 날이 멀지않았다 싶어 서글
프다.
뜬금없이 이별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삶의 지혜가 늘어나는 것이 아닐까. 우아함이란, 존재의 여분에서 생겨나는 것도 알게 되었고, 마음의 상처도 되도록 최소화하여 별 흔들림 없이 살아남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내가 온 곳과 돌아갈 곳도 저절로 알게 되고, 언제든 홀연히 그곳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것도 억울하지가 않다. 네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그러고 보니 내 과거,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에서 나의 인내심, 능력, 유약함을 찬찬히 살펴보고 얼마나 될는지 모르는 내 삶을 겸손하게 마주하며 살고 싶다.
황금빛 들판의 풍요가 사그러들면 속절없이 한해가 저물게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세상을 보려했던 미욱한 자신, 알고 보니 세상이 물구나무를 선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물구나무를 서 있었다.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가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의 시인 천상병님은 이 세상을 소풍 나온 것이라고 했다. 나도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름답게 살다가노라고 말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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