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5-11-23
|
글쓴이 : 김수연 농사를 지으며 든 생각을 글과 노래로 만든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기타를 가르치고, 가끔 공연 하러 방방곡곡 다닌다. |
뻘
함민복(말랑말랑한 힘 / 문학세계사)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
저는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좌우지간 단단하고 굳세게 살라는 시는 봤어도, 말랑말랑한 힘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가 있다니!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시에 쓰인 것처럼 자꾸만 되뇌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잊혀진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요즘 세상은 말랑한 것을 미워합니다. 말랑한 것은 나약한 것과 같은 말이 되었고, 사람들은 자기 말랑함을 애써 숨깁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라고 하면서요. 정말로 우리에게 말랑함은 필요 없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꽤 오랫동안 우직한 아버지들 밑에서 살아온 탓에, 말랑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어버린 걸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제가 만난 말랑한 것들을 하나, 둘 떠올려 보았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변함없이 따듯했던 어머니의 품이나, 어느 날 아버지가 제 등을 툭 치며 건넨 "잘할 필요 없으니 너답게 살아라."라는 문장, 추운 겨울날 밭에 나가 있는 제 몸을 녹여주던 노란 햇볕은 모두 말랑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말랑한 땅에 고구마와 콩과 배추를 심어 먹고, 나무에 달린 감도 날이 갈수록 말랑하게 익어갑니다. 떠올려보니 내 삶을 이루고 있는 말랑한 것이 참 많습니다. 지금껏 제 삶을 지탱해 준 것은 단단한 것이 아니라 말랑한 것들이었던 겁니다. 삶에는 분명 치열함이 있지만, 그 과정을 통해 부드럽게 영글어가는 마음이 있습니다. 오히려 삶의 쓴맛을 본 자만이 진정으로 부드러워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다정함은 내가 세상과 싸우는 방식이야." 때로는 어떤 말보다도 힘이 센 것이 한 줌의 다정함입니다. 생강차를 만들다가 몸이 고단해서 공장 부엌에 누워있으니, 송송송 파를 썰던 이모가 "니 일 마이 했다. 10분만 쉬었다 하래이."라고 말을 건넵니다. '니 일 마이 했다'라는 그 말이 누워서 10분을 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줍니다. 뻐근한 허리만큼이나 마음까지 뻣뻣해지려 할 땐 그 다정한 말 한마디가 언 땅을 녹이는 봄볕처럼 느껴집니다. 날이 갈수록 고된 농사일을 버티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나를 진정으로 강하게 만든 것들을 떠올려봅니다. 꽃잎 넣은 물에 차가 우러나오듯 말랑하고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들 얼굴이 슬며시 떠오릅니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