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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작성일 2017-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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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파이주홍선생기념사업회장 이정일

 

사람과의 만남은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다.? 만났다가 헤어지면 온 세상이 없어진 것 같이 슬프지만 다시 새로운 만남이 있어 희망으로 살게 된다. 나 역시도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연습을 칠십여 년 째 하고 있다. 내 곁을 떠나가신 부모님은 물론이고 일가붙이들과의 헤어짐도 무수하게 겪었다.

 

너무나 가슴 아픈 헤어짐이라 차마 말 못하는 사연도 있다. 세상에서 처음으로 내게 아버지라는 말을 해주던 딸아이와의 이별이다. 대학을 다니던 중, 사고로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가슴 아픈 시련도 회자정리라 생각하며 견디었다.

 

여러 차례 저승을 오갔던 아픔도 있었지만 아직도 건강하게 살고 있다. 나는 대체로 운이 좋은 편이다. 타고난 건강을 조상님의 음덕이라 여기며 산다. 젊은 사람이 건강이 좋지 않은 경우는 자기 자신의 노력 부족이며 게으름 때문 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운동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 늘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예년에 비해 여름 가뭄이 길어지고 있다. 대지는 무더위로 허덕이는데 반가운 비 소식이 없다. 남부지방은 해갈이 어려워 안타까움에 목이 타는데 중부 이북은 물난리가 났단다. 비 같은 비 2백 밀리 이상은 와 주어야 하는데 비는 오지 않고 밤새워 천둥번개만 요란했다. 큰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속담을 이럴 때 쓰는가 보다.

 

가뭄이 계속되는 요즘, 오래전 내 곁을 떠나신 장모님 생각이 불현듯이 난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다 그렇듯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부모에게는 항상 철없는 자식이리라.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오로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며 걱정만 하시던 장모님은 우리 집에서 27년을 함께 사셨다.

 

몇 마지기 농사밖에 지어 본 적이 없는 내가 합천군 율곡면 임북리에 18필지의 만 이천 평 되는 농사를 짓기로 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안될게 뭐있겠냐 싶어서였다. 우선 2명의 머슴을 두었다. 그들의 1년 새경은 나락 15섬과 하루 6끼와 매일 담배 한 갑이었다. 큰 부담이 아닐 수가 없다. 농사일은 매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농사가 잘되건 못되건 모든 것은 주인이 책임져야한다.

 

내일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저녁밥을 먹으면서 작전회의 하듯이 같이 의논을 할 때는 속이 갑갑해질 때가 많다. 요즘은 농기계가 좋아 얼마나 편한 세상이 되었는가. 그때 그 시절은 소한마리가 논을 하루 종일 갈면 천 평에서 천 삼백평정도 갈았다. 물을 대고 써레질을 해야 하는 재래식 농사법으로 농사꾼도 소와 함께 육칠 십리를 걸어 다녀야 할 정도로 고달픈 날들이었다. 그래서 쟁기질을 잘하고 밭을 가는 훌칭이질을 잘하는 장골 상머슴은 15, 쟁기질을 하는데 훌칭이 질을 못하는 장골은 12, 꼴머슴이라고 일반잡일을 하는 젊은이는 8섬을 새경으로 주었다.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날이 있다. 1972년 가을이다. 그때만 해도 한사람이 논 이백평 이상의 나락을 베면 장골이라고 일 잘하는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장골일꾼 10여명을 더 부르고 우리식구들 전부가 달려들어 논 삼천 평을 베어 깔아 놓았다. 그런데 웬걸, 저녁부터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밤새 비가 쏟아져 벼가 물에 잠겼다. 그런 참담한 입장을 지켜보시던 장모님이 얼마나 답답하셨는지 나에게 마구잡이로 화를 내시는 게 아닌가. 장모님보다 더 가슴 치던 나는 속으로만 끙끙거리고 있는데, 아랑곳없이 생전처음으로 벼락같은 호통을 내리셨다. 그렇게 화를 나에게 내는 것은 처음이라 꾹 참다가 나도 모르게 장모님께 한소리를 하고 말았다.

 

하늘이 하는 일을 우짜겠습니까? 농사는 하늘이 짓는 것이지, 사람은 일만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고.

 

그 당시 우리 집 농장은 영창리 신소양 건너편 임북리 섬들이라는 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신소양옆 금양리쪽으로 공동묘지가 내려다 보였는데, 속이 말이 아닌 나는 장모님께 공동묘지를 손을 들어 가르키면서 한마디 더했다.

 

엄마,엄마! 저 공동묘지 한번 쳐다보이소.”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공동묘지가 부옇게 보였다.

 

저 많은 무덤 가운데 일 다 하고 죽은 무덤 없고, 이유 없는 무덤이 없는 것을 보면 그렇게 애간장을 태우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는 나도 모르게 장모님을 엄마라고 부르면서 말하고 돌아섰다. 그 말이 떨어지자 말자 이상하게도 종일 올 것 같은 비가 그치면서 해가 나기 시작했다. 생전 안 그러던 사위가 말대꾸를 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나신 장모님은 이제 나는 모른다. 니 알아서 다해라하시면서 십리길이나 되는 읍내 작은 집으로 가셨다. 화가 나서 가는 사람에게 잘 다녀 오이소하고 뒤에다 인사를 하니까 인자 안 올란다하시면서 떠나시는 뒷모습의 장모님이 지금도 눈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이틀 뒤가 합천 장날이었다. 부모 자식 간에 무슨 억하심정이 남겠는가. ‘장에 나와서 이틀 동안 잘 지냈습니까하고 장모님을 찾아 인사를 드리니, 돌아앉으시며 인사도 못들은 척 하시던 노인이 운제 갈끼고하신다. ‘장거리 좀 사고 좀 있다 갈랍니다했더니 그라몬 갈 때 같이 들어가자하시는 게 아닌가. 그날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장모님생각을 하는 날이면 그날일이 떠올라서 목이 메인다. 장모님 그립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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